달력을 보니 또 12월 31일이고 또 새해다. 2026년이다. 그런데 내 나이는 3년째, 아니 5년째 제자리걸음인 것만 같다.
'만 나이' 통일법이 시행된 이후로 내 시간은 기묘하게 꼬여버렸다. 분명 거울 속 내 피부는 하루가 다르게 푸석해지고, 체력은 방전된 배터리처럼 뚝뚝 떨어지는데, 주민등록상의 나이는 그대로다. 해가 바뀌어도 나이는 그대로고, 생일이 지나야 비로소 한 살을 먹는 이 시스템.
이제는 "몇 살이세요?"라는 질문이 세상에서 제일 난해하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부터 그냥 "ㅇㅇ년생입니다"라고 태어난 연도를 말해버린다. 굳이 내 나이를 계산해서 알려주기보다, 상대방과 내가 몇 년 차이가 나는지만 인지시키면 그만인 것 같아서다.

나이는 멈췄는데, 왜 짐은 무거워지는가
숫자로서의 나이가 멈춰있다는 건, 묘하게 억울한 일이다. 내 몸은 분명 작년보다 쇠했고, 회복력은 더뎌졌다. 하지만 사회적인 나이가 그대로라는 핑계로, 혹은 겉보기에 아직 '그 나이'라는 이유로 나는 몇 년 전과 똑같은 강도의 일을 해내야 한다.
그 노동이 정당한 대가가 주어지는 일이라면 차라리 낫다. 하지만 그것이 누군가를 위한 봉사나, 집안일 같은 '그림자 노동'일 때는 화가 치밀어 오른다. "나는 이마만큼 쇠했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이 짐을 져야 하나." 몸은 비명을 지르는데, 줄어들지 않는 숫자가 마치 묘하게.. 데스크가 내게 빠꾸놓을 때처럼 '다시', '다시 해와' 하고 리플레이 버튼을 누르는 기분이다.

며느리의 신정, 그리고 '떡국'의 아이러니
어릴 때부터 사람들이 외치는 "해피 뉴 이어"가 낯설었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오늘인데, 고작 해가 바뀌었다고 호들갑을 떠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며느리가 되고 나니 그 인사는 낯선 것을 넘어 '화딱지'가 나는 말이 되었다.
신년 아침, 식탁엔 당연히 떡국이 올라와야 한다. 그러면서 남편은 옆에서 "우리 장보는 비용 아껴야해"며 훈수를 둔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솟는데, 구색은 갖춰야 하고 돈은 아끼라니. "그럼 신정을 떡국으로 시작하지 말든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12월 31일 천근만근한 몸으로 장을 봐다 떡국 육수를 미리 끓인다.
더 싫은 건 시가에 인사를 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참 부지런도 하지. 신정도 챙기고 구정도 챙긴다. 덕분에 며느리들의 명절 스트레스는 분기별로 돌아온다. 시가가 싫어죽겠기보다도 거기서 평소에 나답지 않은 행동을 해야하는 게 현타가 오고 피로하다. 신정 인사, 좀 있다 또 구정, 두 번이나 새해 인사를 강요받는 우리나라 시스템 자체가 피로하다. 나이는 제자리인데 명절 노동은 따박따박 돌아오는 현실이라니.

해피 뉴 이어, 그것은 생존을 위한 주문(Incantation)
새해 첫날, 복권 판매점 앞을 지나다 길게 늘어선 줄을 보았다. 1등이 나왔다는 그 명당 앞에는 오전부터 희망을 사려는 차들이 즐비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외치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해피 뉴 이어"는 축하 인사가 아니라, 일종의 주문(Spell)이 아닐까.
어제와 똑같이 지긋지긋한 삶이 이어질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몸은 늙어가고, 의무는 줄지 않으며, 통장은 가볍다. 이 팍팍한 현실을 맨정신으로 버티기엔 너무 힘드니까, 마치 최면을 걸듯 서로에게 외치는 것이다.
"새로울 것 하나 없지만, 마치 새것인 것처럼 다시 한번 살아내 봐."
그렇지 않으면, 이 무거운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놓아버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 복권 줄에 서 있는 사람들의 심정도, 떡국을 끓이며 화를 삭이는 나의 심정도 본질은 같을 것이다. 하루 차이지만 달라지라는, 제발 좀 달라지면 좋겠다는 간절하고도 슬픈 기대.
2026년, 내 나이는 여전히 헷갈리고 몸은 여전히 고단하다. 그래도 나는 억지스럽게 주문을 외워본다. 이 지긋지긋한 일상을 또 일 년 버텨내기 위해서.
해피 뉴 이어. 부디 이 주문이 당신에게도 유효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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